헤르베르트 4세 (베르망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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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르베르트 4세는 1028년 또는 1032년에 태어나 1080년 2월 23일에 사망한 베르망두아 백작이다. 1045년 부친 오토 1세의 뒤를 이어 베르망두아 백작위를 계승했으며,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에게 봉사했다. 아델라 드 발루아와 재혼하여 외드 1세와 아델라이드 드 베르망두아를 두었으며, 장인과 처남의 사망으로 발루아 백작령과 일부 영지를 물려받았다. 아들 외드 1세가 정신 질환으로 인해 베르망두아 백작위를 딸 아델라이드와 사위 위그 1세에게 넘겨주었고, 헤르베르트 4세 사후 아델라이드는 발루아 백작령을 상속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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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베르트 4세 (베르망두아) | |
---|---|
기본 정보 | |
다른 이름 | Herbert IV of Vermandois (영어) |
작위 | 베르망두아 백작 |
재위 기간 | 1045년 - 1080년 |
출생 | 1028년 |
사망 | 1080년 |
배우자 | 아델라이드 드 발루아 |
자녀 | 아델라이드 우도 1세 제라르 |
가문 | 베르망두아 가문 |
아버지 | 베르망두아 백작오토 |
어머니 | 파비아 |
2. 생애
1028년 또는 1032년에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오토 1세(Otto I 또는 Eudes/Odo)이고 어머니는 파비아(Pavia 또는 Patria)이다.[3] 그는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인 피피노 카를로만의 후손으로, 베른하르트 1세의 서자인 상리스 백작 피핀 2세의 6대손에 해당한다.
1077년 처남 벡상의 시몬이 은퇴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가자, 헤르베르트 4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의 도움으로 시몬의 발루아백작직과 엘뵈프 영지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페로네 영지는 받지 못했다.[3]
1045년 5월 25일, 아버지 오토 1세가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베르망두아 백작직과 블루아 백작직을 계승했다. 이후 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첫 부인 게르트루데(Gertrude)와의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었다. 1060년경, 그는 발루아 백작이자 비트리(Vitry), 벡상(Vexin), 아미앵(Amiens)의 백작이며 크레피(Crépy)의 영주였던 발루아의 랄프 4세(Ralph IV of Valois)의 딸 아델라 드 발루아(Adèle de Valois, 1040년 ~ 1077년)와 재혼했다. 아델라는 아델라 드 바르(Adélaïde de Bar) 또는 블루아의 앨리스로도 불린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들 외드 1세와 딸 아델라이드 드 베르망두아가 태어났다.
1074년 발루아의 랄프 4세가 사망하자 그의 영지는 아델라의 오빠인 시몬(Simon)에게 상속되었다. 그러나 1077년 시몬이 수도원에 들어가면서 헤르베르트 4세가 발루아 백작령과 일부 영지를 물려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 영지의 실질적인 소유권은 아내 아델라 드 발루아에게 있었다. 같은 해, 처남 벡상의 시몬이 은퇴하자 헤르베르트 4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의 도움을 받아 발루아 백작직과 엘뵈프(Elbeuf) 영지도 추가로 획득했다. 다만, 페로네(Péronne) 영지는 상속받지 못했다.
그의 아들 외드 1세는 정신질환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 인해 1077년 아버지 헤르베르트 4세에 의해 상속권을 박탈당했다. 이에 따라 베르망두아 백작직은 딸 아델라이드 드 베르망두아와 그녀의 남편 위그 1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딸 아델라이드 드 베르망두아는 1078년 프랑스 국왕 앙리 1세의 셋째 아들인 위그 1세와 결혼했다.
헤르베르트 4세는 1080년 2월 23일 사망했다. 정확한 사망 원인과 사망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사후, 아들 외드 1세는 어머니 아델라 드 발루아를 통해 외할아버지 발루아의 라울 3세와 외삼촌 벡상의 시몬의 영토였던 발루아 백작령을 상속받았다. 그러나 외드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헤르베르트 4세의 영지는 결국 딸 아델라이드를 통해 사위 위그 1세에게 상속되었다.
3. 상속 문제
헤르베르트 4세는 1080년 2월 23일 사망했으며, 정확한 사망 원인과 사망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뒤는 아들 외드 1세가 이었으나, 외드 1세는 정신 질환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2] 이 때문에 외드 1세는 상속권을 제대로 행사하기 어려웠고, 결국 베르망두아 백작령은 그의 딸 아델라이드 드 베르망두아와 사위 위그 1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딸 아델라이드 드 베르망두아는 1078년 프랑스 왕 앙리 1세의 셋째 아들인 위그 1세와 결혼했다. 헤르베르트 4세 사후 아들 외드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헤르베르트 4세의 영지는 딸 아델라이드를 통해 사위 위그 1세에게 최종적으로 상속되었다. 이로써 베르망두아 백작령과 발루아 백작령은 카페 왕가의 중요한 영토가 되었다.
4. 가족 관계
첫 번째 남편: 위그 1세 (1057년 ~ 1101년 10월 18일) - 프랑스 왕앙리 1세의 아들.
두 번째 남편: 르노 2세 (1075년 ~ 1152년/1162년) - 클레르몽 백작.
부인 : 헤드비가
헤르베르트 4세가 1080년 사망한 후, 그의 영지인 베르망두아와 발루아는 딸 아델라이드의 남편 위그 1세에게 상속되었다. 이는 카페 왕조에게 중요한 기반을 제공했다.
참조
[1]
간행물
De Genere Comitum Flandrisium Notae Parisiensis
https://archive.org/[...]
MGH
1881
[2]
서적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https://archive.org/[...]
[3]
서적
Famille et pouvoir dans le monde franc (VIIe-Xe siècle)
Publications de la Sorbonne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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